[미르기닷컴] 앞의 글에 이어서 『탁영호 작품집─지비』와 『탁영호 작품집─도바리』를 소개하는 글입니다. 중견 만화가 탁영호씨가 새롭게 도입한 판화 형태의 채색 기법이 1980년대 ‘민중미술’을 연상시키는 『지비(紙碑)』와 『도바리』는, 그 독특한 화면 구성이 특히나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이하는 평어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3. 『도바리』의 속살과 알맹이
1) 시놉시스(Synopsis)
학생운동을 하다가 경찰의 체포를 피해 도피 중인 주인공은 서해안의 어느 조용한 어촌마을로 들어온다. 소설가 행세를 하며 민박 중인 주인공은, 외지인에게 후한 인심을 쓰는 마을사람들의 모습에 잠시 안정을 되찾는다. 하지만, 마을의 정신지체 처녀는 남자들의 성 착취의 대상이었고 모두가 이를 묵인하고 있는 것을 주인공을 알게 된다.
어느 날, 경찰관과 보건소 직원이 배가 불러버린 이 처녀와 함께 마을에 와서는 태어날 아이를 봐서 협조해 달라고 요청하지만, 마을사람 모두가 이를 외면한다. 외지인인 주인공은 누명을 덮어쓸까 마을에서 달아난다. 읍내에서 마을남자들은 중학교 선배인 정보과 형사를 접대하며 ‘선처’를 구한다. 다방 아가씨들과 함께 여관으로 가는 그런 접대.
간척사업이 이루어지던 어느 마을에서 무작정 멈춘 주인공은, 마음씨 좋은 아저씨를 만나 한동안 그 집에서 조카노릇을 하며 일을 돕는다. 사회정화위원장의 횡포에 묵종하던 마을 주민들 속에서, 주인공은 틈틈이 후배가 전한 노트를 남몰래 틈틈이 읽는다. 1980년 5월 광주의 상황을 기록한 노트이기 때문이다.
아저씨는 원래 물밑에 있다가 간척사업 때문에 뭍으로 드러나 버린, 사람이 웅크리고 누워있는 모양의 작은 돌산에 관한 대한 전설을 이야기해준다. 주인공의 꿈속에서, 돌산은 거인의 형상으로 부활하여 공장이 뿜어대는 시커먼 연기 속에서 내려온 악귀를 물리친다. 하지만 ‘광주의 총부리’ 앞에서 거인은 산산히 조각나고 만다….
그로부터 먼 후일(뉴스에서 유신시절 인민혁명당 사건 무죄선고가 나오는 2007년이지만), 주인공은 (40대 초중반으로 추정되는) 진짜 전업소설가로 살아가고 있었다. 친구들과 오랜만에 술자리가 잡힌다. ‘당(黨)’에 들어가 정치에 몸 담그게 될 친구, 교수가 되었다고 ‘뻣뻣하다’는 시샘을 듣는 친구 등등. 주인공은 술만 마시면 후배의 「광주 일기」를 읽는 버릇이 있었다. 이날 밤도 일기를 읽으며 혼자 운다.
2) 작가의 말
‘도바리’는 1980년대 당시 시국사건으로 수배 중인 사람들이 검거망을 피해 도망치던 것을 가리키던 은어이다. 만화 『도바리』도 수배 중인 운동권학생이 주인공이고, 도바리 생활 와중에 겪었던 일들이 주요사건으로 연결된다. 특히 거대한 국가조직의 폭력 안에서 그 폭력에 길들여지거나, 스스로가 새로운 폭력의 가해자가 될 수 있는 현실을 보여주려 했다. 그리고 신념을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1980년 광주항쟁의 시민군들을 통해 우리들의 폭력에 대한 불감증을 역설해 본다.
나는 만화 『도바리』 작업 내내 심한 가슴앓이를 해야 했다. 알 수 없는 답답함이 나를 괴롭혔다. 아마 만화 속 주인공의 풀지 못한 숙제들이 내 것인 양 고뇌했던 것 같다. 겨우 작업을 끝냈다. 창문을 여니 낯선 바람이 불어온다. 밤하늘에는 아직도 돌산이 군데군데 떠돌고 있다. 아직도 풀리지 않은 한들이 참 많다.
4. 총평
유행과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온 작가 탁영호는 2007년 신작 『지비』와 『도바리』를 통해 오래전부터 다루고 싶어 한 인간 내면과 경외의 대상 그리고 사회문제를 지면에 이끌어낸다. 1980년대 ‘현실참여’와 ‘민중문학’이라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활동해 온 그에게는 ‘민중만화가’라는 수식어가 붙기도 하였다.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까지의 시대는 성장통의 혼란으로 점철되었는데, 이 시기의 예술가들은 사회와 연결된 끈을 놓지 않았고 인간(人間)이라는 테마를 끌어안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1990년대에 시작해 결국 그 90년대를 넘기지 못하고 사라져버린 한국의 성인만화 잡지들은, 업계에는 상처를 남겼을지 몰라도 독자의 입장에서는 ‘만화는 애들이나 보는 것’이라는 편견을 뛰어넘어 새롭고 깊이 있는 작품과 작가들을 만날 수 있게 해주었다. 199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섹스어필과 바이올런스로 점철된 작품들이 ‘성인용’이라는 명찰을 달고 대거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작가 탁영호는 조금은 차별화된 성인 작품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보인다.
상업예술이라는 만화, 그 중에서 ‘상업’이라는 측면만이 유달리 부각되어 보이는 현실 속에서 탁영호는 ‘예술’이라는 또 다른 측면에 무게를 얹어주는 희유한 작가임에 틀림없다. 이번 신작 『지비』와 『도바리』는, 그 그림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것은 참으로 귀한 시도”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지비』에서는 1980년대 대학가에서 ‘걸개그림’이라 불렸으나 지금은 웬만한 장소에서는 거의 보기 어려워져가는 민중미술의 형식이 고스란히 살아있다. 그 이유로는 작가 그 자신이 80년대 민중미술의 갈래였던 판화운동 작업에 직접 참여한 경험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작가는 토속성과 강한 호소성을 판화형식의 특징으로 꼽았다. ‘민중의 한(恨)’이라는 전통적 소재의 연장선 위에 있는 작품인 『도바리』에서는 격변기의 우울한 시대상과 폭력에 대한 무감각함을 표현하고자 거친 붓 그림체를 시도하였다.
작가는 『지비』에서 십장생(十長生)과 십이지신(十二支神), 무속신앙적인 소품을 대거 동원하고 있는데, 차기작에서는 민화를 표현수단으로 사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작가의 이러한 시도는 전통문화나 표현법과 거의 단절된 체 인터넷 중심으로 지내고 있는 세대에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한다. 그런 사고방식의 변환이 옛것과 새것을 이어주는 중요한 자산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역사는 우리의 현재 위치를 알려준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인간이 범할 수 있는 오류를 어떻게 하면 줄일 수 있는가?”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밝힌 탁영호 작가는, 현재 화가 이중섭과 시인 정지용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1948년 제주 4·3 항쟁에 관한 작품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좋은 글을 써주신 필자에게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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