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한국 만화

탁영호 작품집 첫 번째 권 『지비』. [코믹팝 한국만화]

mirugi 2007. 11. 29. 22:02

[미르기닷컴] 2007년 올해 만화와 만화·애니메이션 등의 관련서적을 출판하는 출판사 겸 출판기획사 코믹팝 엔터테인먼트(대표 선정우)에서 출간한 『탁영호 작품집─지비』『탁영호 작품집─도바리』를 소개해보겠습니다. 중견 만화가 탁영호씨가 새롭게 도입한 판화 형태의 채색 기법이 1980년대 ‘민중미술’을 연상시키는 『지비(紙碑)』와 『도바리』는, 그 독특한 화면 구성이 특히나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아래는 『지비』와 『도바리』의 보도자료용으로 작성한 문서입니다. (평어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 저자 탁영호가 걸어온 길

 

저자 탁영호는 1960년 대전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는 건축을 전공했으며, 대학원에서 애니메이션을 전공했다. 1982년에 가톨릭농민회 회지에 단편작 『학마을 사람들 이야기』를 발표하면서 만화창작 활동을 시작했으며, 1986년에는 숙명여대 교지에 연작 『노동수첩』을 발표했다. 1987년부터는 무크지 및 당시 창간 붐이 일어난 주간 만화잡지를 무대로 정식 데뷔하여 꾸준히 사회파 단편작품들을 발표해 왔으며 그 성과로 1990년대 후반부터는 이렇게 발표된 단편작품들의 모음집이 여러 출판사에서 간행된 바 있다.

 

그는 소위 ‘상업적으로 잘 각광받지는 못하는’ 사회파 단편작품의 창작 기반을 마련하기 위하여 틈틈이 과학 및 역사분야의 학습만화와 동화 작업을 꾸준히 맡는 방법론을 선택했는데, 2000∼2004년 한겨레신문에 「과학 미리 보기」 코너의 주간연재를 진행한 것도 이의 연장선상이라 하겠다. 2002년엔 영화 『품행 제로』에 삽입된 3분짜리 애니메이션을 제작하여, 만화에서 애니메이션으로 활동공간을 넓혔다. 2004년부터 2005년까지 ‘이슬람 바로 보기’ 시각에서 어린이용으로 기획된 『아라비안 나이트』 시리즈의 일러스트를 담당했다. 이러한 다방면의 경험을 바탕으로 2004년에 단편애니메이션 제작과 만화실기 이론서인 『단편만화를 위한 탁선생의 강의노트』를 집필하여 후진양성과 세대 간 가교역할에 노력 중이다. 인터넷 기반 청소년문화가 문화예술계의 세대 간 소통부재를 증폭시켰기 때문이다. 우리만화연대 회원이며, 춘천만화문화원 초대 원장을 역임하였고, 현재 전주대학교 영상예술학부 겸임교수로 있으며 세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학과에도 출강하고 있다.

 

 


 

 

 

2. 『지비(紙碑)』의 속살과 알맹이

 

1) 작가의 말

『지비』는 시인 이상(본명 김해경, 1910∼1937)이 지은 동명의 시를 소재로 하여, 식민지 시대의 피곤한 인텔리의 분열을 통해 일탈과 자유를 추구하는 과정을 그렸다. 그리고 시인에 대한 오마주이다. 시인 이상을 상징하는 주인공 ‘나’는 자신의 의지와는 다른 타성에 의해 조직적이며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제도를 거부한, 아니면 그 제도로부터 소외된 이단자이다. 나는 자신의 정체성과 문제의식의 발단을 순수에서 찾으려 한다.

 

순수의 기억여행을 떠난 나는 꿈을 꾸듯 아니면 깊은 시름 속에서 새어나온 잡담처럼 옛것들과 조우한다. 거짓말처럼 지나가버린 열렬한 사랑의 감정이 나를 세상에 입문하게 만든다. 세상은 권리보다는 의무를 먼저 권한다. 세상의 틀은 질서를 위해 법과 도덕을 만들었고, 그것들은 세상을 다루기 위한 통치의 수단이자 권력의 상징이기도 하다. 나는 생활을 얻었으나 자유를 잃었다. 자유에 대한 갈망은 방랑자의 길을 걷게 한다. 그때서야 ‘나’는 내 안의 자유가 자신을 감금했던 족쇄임을 깨닫는다….

 

개인적인 사연을 잠시 말하면, 십대 중반쯤을 넘어설 때 답답함이 몰려왔다. 이유를 몰라 애를 태우다가, 화생방훈련에 쓰던 비닐봉지를 뒤집어 쓴 채 집 마당에서 몇 시간을 버틴 적이 있었다. 한여름의 땡볕 아래서 실컷 땀을 흘리고 나니 조금은 시원해졌다. 아마 낮선 세계에 대한 동경이었을 것이다.

 

심야시간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들었던 김민기의 노래, 경아의 목소리가 오랫동안 맴돌았던 이장호의 영화, 너무 슬퍼서 감히 흉내를 못 냈던 이중섭의 그림, 알 수 없는 독설이 마음에 들어 계속 읊어대던 이상의 시―이것들은 그 당시 내가 누릴 수 있었던 최고의 충격들이었다. 만화 『지비』는 그때의 감동을 구체적으로 풀어낸 것이다. 나와 이상의 만남. 나는 그의 얘기를 통해 세상의 이면을 조금이나마 드러내고자 했다. 그리고 그것은 나를 찾아내는 작업이기도 했다.

 

 

2) 원전이 되는 이상의 시

 (1) 『거울』 : 1933년 「가톨릭청년」에 발표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만은

거울이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

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만은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에골몰할께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반대요만은

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2) 관련해설

작가는 권말에서 『지비』의 모티브는 일본이 낳은 세계적 거장인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감각의 제국』(1976년)에서 시작했다고 밝히고 있다. 실화인 이 작품은 우리나라 개봉 시에도 많은 논란과 삭제소동을 빚은 작품으로, 1936년의 군국주의 시대상 속에서 ‘세상 탈출’을 꿈꾸며 병적으로 서로의 육체를 갈구한 남녀의 비극적 최후를 다루고 있다. 신분의 벽을 뛰어 넘을 수 없는 여자가 결국 남자를 죽이고 그 남근을 잘라내어 간직한다는 엽기적인 모습은, 당시 제국일본의 사회상과 침략성을 치환한 것이다.

 

이상이 도쿄에서 객사한 1937년은 중일전쟁이 발발한 역사적인 해이다. 그는 이해 일본에서 체포되어 고초를 겪는다. 『지비』의 습작에서는 ‘제국대학’ 출신이지만 경찰에서 고문당해 무능력자로 화해버린 식민지 지식인의 우울한 일상이 배경이다. 기생집을 하며 형부와 엉키는 아내에게 얹혀사는 그는 무능력한 ‘남근’에 불과하다.

 

1929년 시작된 대공황은 ‘각자의 호황’을 누리던 제국일본과 식민지 조선에도 엄청난 변화를 몰고 왔다.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침략전쟁을 돌파구로 선택하고, 그에 따라 20년대 의회민주주의는 군국주의 사회문화에 압살되고 만다. 조선 또한 일본의 병참기지화 정책으로 인해 자본투여를 받게 되지만 ‘땅’을 떠나는 이들 또한 늘게 된다.

 

작가 탁영호는 『지비』를 완성하는데 5년의 시간이 들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구상을 시작한 해는 2000∼2001년이라고 생각된다. 이 시기, 우리나라는 1998년 시작된 IMF사태로 인해 경제적 고난이 노정되던 시기였다. 일가족 동반자살, 주부들의 탈선알바 등이 사회문제화 되어 한 시절의 눈과 귀를 끌었다. 『지비』에서도 무능력한 가장을 대신하여 아내는 쓸쓸히 몸장사를 하러 나간다. 작중에 빈번히 묘사되는 남녀의 성기는 실존보다 더 급한 생존의 절박함을 적나라(赤裸裸)하게 드러내 주는 은유인 것이다.

 

작가에게 영감을 준 『감각의 제국』과 『지비』는 이렇게 연결고리가 이어진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일본은 1945년 패전 후 전쟁미망인과 구직시장에서 밀려난 여성들의 생존 차원의 매춘을 묵인한 역사가 있다. 적선지대(赤線地帶)라는 우울한 조어(造語)가 이를 반영한다. 이것이 1998년 이후 몇 년간 우리나라에 재현되었던 것일까.


공교롭게도 IMF사태 이후 곧이어 IT열풍이 일어났고, 그 후 ‘멀티플렉스’ 극장 열풍과 한국영화 열풍이 일어났다. 작가 탁영호는 찰리 채플린을 대표로 내세워서 현실의 간난신고를 잊고 싶어 하는, 아니 거기에서 도피하고 싶어 ‘다른 세상’에 탐닉하는 시대상을 비유의 장막 속에서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인터넷 만화언론 「만」과의 인터뷰에서 “이상 시인의 시 자체는 어느 시점 어느 환경에서 읽느냐에 따라서 느낌이나 해석이 달라지곤 한다. 시라는 것은 사람에 따라서 다양한 느낌과 해석이 가능하다”, 그리고 “20세기 역사의 희비극적인 상황은 찰리 채플린의 삶과 흡사하고 그의 설정은 이방인적 자유정신을 상징한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알아야 한다. 인터뷰에서 창작자가 모든 것을 먹기 좋게 다 밝혀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좋은 글을 써주신 필자에게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2007 [mirugi.com] http://mirugi.com/

 

Daum 블로거뉴스
블로거뉴스에서 이 포스트를 추천해주세요.
추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