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르기닷컴】 지난 2006년 7월 29일 일본에서, 그리고 2006년 8월 10일 한국에서 개봉된 스튜디오 지부리의 작품 『게드 전기』를 그저 단순하게 ‘흥행 실패작’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반지의 제왕』『나니아 연대기』와 더불어 ‘세계 3대 판타지 소설’ 중 하나라는 어슐러 K. 르 귄(Ursula K. Le Guin)의 『어스시의 마법사(A Wizard Of Earthsea)』를 애니메이션 영화화했다는 점, 그리고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장남 미야자키 고로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는 점에서 화제를 모은 『게드 전기』는 총 76억 5천만엔(≒약 650억원)의 흥행 결과로 2006년도 일본 영화 전체의 흥행수입 1위를 기록했을 뿐더러(외화를 제외한 수치),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이 결과가 스튜디오 지부리의 역대 흥행기록 4위에 해당하는 높은 수치라는 것입니다.
의외일지 모르겠지만, 이는 사실입니다. 스튜디오 지부리 작품의 역대 흥행수입 순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304억엔/일본 역대영화 흥행수입 1위)
2위 『하울의 움직이는 성』(196억엔/일본 역대영화 흥행수입 2위)
3위 『모노노케 히메』(192억엔/일본 역대영화 흥행수입 3위)
4위 『게드 전기』(76억5천만엔)
5위 『고양이의 보은』(64억6천만엔)
6위 『붉은 돼지』(47억6천만엔)
7위 『헤이세이 너구리전쟁 폼포코』(44억7천만엔)
8위 『마녀의 택급편』(36억6천만엔)
9위 『추억이 방울방울』(31억8천만엔)
10위 『귀를 기울이면』(31억5천만엔)
보다시피 『게드 전기』가 4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특히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1위부터 3위까지의 작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하울의 움직이는 성』『모노노케 히메』 세 작품이 전부 일본 역대영화 흥행수입 전체 1∼3위에 올라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일본영화 전체에서 랭킹 1∼3위라는 이야기니, 이들 3작품은 완전히 별도의 레벨로 치고, 나머지 스튜디오 지부리의 모든 작품(!) 중에서는 『게드 전기』가 가장 흥행 성적이 좋았다는 이야기죠.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와 『천공의 성 라퓨타』, 그리고 많은 분들이 놀랄지도 모르겠으나 『이웃집 토토로』까지도 전부 흥행 성적은 그다지 좋지 못했습니다. 위 순위에서 보다시피, 국내에 ‘스튜디오 지부리’란 이름을 알린 계기가 되었던 명작 『나우시카』『라퓨타』『토토로』 세 작품은 공히 지부리 작품 흥행 순위 10위 안에 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웃집 토토로』는 사실, 1988년 일본 개봉 당시에 겨우 80만명의 관객 동원에 그친 ‘흥행 실패작’에 가깝습니다. (물론, 흥행 실패냐 성공이냐를 판가름하는 기준에는 제작비도 감안될 테니까 무작정 『토토로』를 흥행 실패작이라고 그냥 단정짓기는 곤란하겠습니다만.)
참고로 2002년 개봉된 『고양이의 보은』은 550만명의 관객을 동원했고, 『게드 전기』는 588만명,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이르러서는 무려 2350만명을 동원한 바 있죠. 그러니 『이웃집 토토로』의 80만명이 지부리 역대 흥행 성적 TOP10에 들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게드 전기』의 작품에 대한 평가가 일본에서라고 그다지 높았던 것은 아니라는 점에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게드 전기』에 대해 혹평이 많았고, 덕분에 흥행 성적도 최근 개봉된 스튜디오 지부리의 신작 중에서는 굉장히 낮은 축에 속했죠. 일본에서도 『게드 전기』보다는, 비슷한 시기에 개봉되었던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 호평이 몰렸습니다. 덕분에 2006년도 제 30회 「일본 아카데미상」에서도 최우수 애니메이션 작품상은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 돌아갔고, 『게드 전기』는 『브레이브 스토리』『폭풍우 치는 밤에』『명탐정 코난 탐정들의 진혼가』 등과 함께 우수 애니메이션 작품상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드 전기』의 흥행 기록 76억 5천만엔은,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2억 6천만엔에 비해 거의 30배 가까운 차이를 보였던 것이죠.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일본에서의 관객 동원수도 겨우 20만명에 불과했습니다. 이 역시도 『게드 전기』의 588만명과 비교하면 30배 정도의 차이죠.
그렇다면 어째서 일본에서는 『게드 전기』가 그처럼 인기가 높았는가? 사실 그 해답은 그다지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일본에서 『게드 전기』는 TV 광고를 비롯해서 온갖 매체에 엄청난 물량의 광고를 쏟아냈기 때문입니다. 재미있다는 입소문 때문이 아니라, 하도 광고를 많이 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꼭 봐야 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지 않았나 하는 것이죠.
▲『게드를 읽다.』 (부에나 비스타 홈 엔터테이먼트 발행)
(※개인적으로 필자가 보유하고 있는 책을 촬영한 사진.)
『게드 전기』의 홍보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한 가지 사례가 있는데, 『게드 전기』 개봉이 끝난 후이긴 했지만 2007년 6월 일본에서는 『게드 전기』 관련 서적을 문고판 판형으로 작게 만들어 무료 배포하는 행사를 했습니다. 그런 행사야 일본에서는 자주 열리니까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그 규모였죠.
208페이지의 아주 작은 크기의 문고판 서적이긴 합니다만, 무려 100만부를 제작해서 무료로 배포한다는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2007년 7월 4일 발매되는 『게드 전기』 DVD를 위한 판촉 행사라고 했지만, DVD를 사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전부 무료로 100만부를 뿌리겠다는 이 계획은 실로 일본에서조차 전무후무한 규모였습니다. DVD 프로모션 비용으로만 무려 1억엔을 책정했었다고 하네요.
단행본 100만부가 팔리는 것도 장난이 아닌데, 그걸 공짜로 준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책 제작비만이 아니라 유통 비용도 들었을 것입니다. 일반 서적이라면 서적의 가격 안에 이미 유통 마진도 포함되어 있으니 따로 유통비가 들지 않겠습니다만, 이 100만부는 무료 배포이기 때문에 서점이나 DVD점포에서 나눠준다고 하면 그 유통비도 어느 정도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럼 그 제작비+유통비의 규모가 과연 얼마나 될지….
그렇다면 도대체 왜 스튜디오 지부리는 『게드 전기』의 홍보를 위해 이처럼 올인 전략을 펼친 것일까요? 물론 그 수면 하에는 이미 고령이 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후임을 물색하기 위한 계획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특히 미야자키 고로 감독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장남으로서, ‘미야자키 감독의 후임’으로 내세우기 편하다는 점도 고려되었겠죠.
하지만 그보다도 제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지부리 내부에 쌓여 있을 엄청난 예산 규모입니다. 앞서 스튜디오 지부리의 역대 흥행 순위 1∼3위가 곧 일본영화의 흥행 순위 1∼3위라는 점을 밝혔습니다만, 그 1∼3위 작품 중에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하울의 움직이는 성』, 그리고 5위 작품인 『고양이의 보은』이 전부 2000년대 이후 작품이라는 점에 주목해주십시오.
2001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2002년 『고양이의 보은』, 2004년 『하울의 움직이는 성』까지, 스튜디오 지부리 작품의 흥행 수입은 304억엔+196억엔+64억 6천만엔=564억 6천만엔이나 됩니다. 1997년 『모노노케 히메』의 192억엔도 적은 금액이 아니었고 말이죠.
『모노노케 히메』를 빼고도 2001년부터 2004년까지 스튜디오 지부리는 564억엔 이상의 흥행 수입을 기록한 작품을 연이어 배출했습니다. 물론 흥행 수입이 전부 제작사의 몫은 아니고, 극장·배급사 등과 분배를 해야 하니까 실제 지부리의 수입은 564억엔보다 훨씬 적겠죠. 그러나 그렇더라도 2006년 『게드 전기』 개봉 당시 지부리는 이미 몇 년 동안 벌어들인 돈이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많아진 상황이었음은 분명할 겁니다.
그야말로 돈이 '남아돌 수밖에' 없는 지부리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후임(이 될지도 모르는) 미야자키 고로 감독의 『게드 전기』 홍보에 올인 전략을 펼쳤고 그 결과 ‘스튜디오 지부리 역대 흥행 성적 4위’라는 호성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게드 전기』의 흥행 성공이 과연 스튜디오 지부리에 좋은 영향으로 남을 것인지에 관해서는 조금 회의적입니다. 왜냐하면 국내에서의 흥행 실패가 보여주듯, 『게드 전기』 자체는 그다지 성공적인 애니메이션 작품이라고 하기 힘드니까 말이죠. 원작자인 어슐러 K. 르 귄 역시 본인의 홈페이지를 통해 이 작품에 대해 회의적인 평가를 내렸고,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도 그다지 호의적이라고 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흥행 성적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지부리 내에서는 이 작품을 안 좋게 평가해야할 근거가 희박해지는 셈이죠. 따라서 미야자키 고로 감독에게 후속작이 맡겨질 가능성도 높아지는데, 미야자키 고로 감독 개인적으로야 앞으로 노력해서 좀 더 좋은 작품을 만들 수도 있을 테니 그렇다고 쳐도…. 스튜디오 지부리라는 네임 밸류만 가지고도, 남아도는 자본력을 통한 마케팅 파워만 가지고도 작품을 흥행에 성공시킬 수 있다는 경험이, 스튜디오 지부리 내부적으로 좋은 선례로 남을 리는 없다고 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차기작으로 2008년 여름 개봉 예정인 『절벽 위의 포뇨』가 과연 어떤 작품으로 완성될지에 따라서, 차후의 스튜디오 지부리가 나아갈 길이 정해질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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