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용’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죠. 예를 들어 인용문이 본문보다 많아서 주객이 전도되어서는 안된다든지, 인용문의 출처 명기, 인용된 문장임을 독자가 명백하게 알 수 있도록 표시해야 한다는 등등, 인용문으로서의 조건을 만족할 때에만 인용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게 됩니다. 어쨌거나 그런 조건을 만족시켜서 충분히 ‘인용’임을 인정받을 수 있다면, 인용을 하는 데에 있어서 일일히 원래의 저자 or 필자에게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맘대로 가져다 쓸 수 있도록 해놓았는지 의문인 분들도 있을 텐데요. 상식적인 이야기라 굳이 설명도 필요없을 것 같지만…. 생각해보십시오. 누가 무슨 말을 했는데, 그걸 논문에 사용하거나 신문에 쓸 때에 일일히 연락을 취해서 허락을 받아야 한다면, 세상에 비평이나 보도란 것이 존재할 수가 없죠. 그렇게 되면 우리는 뉴스도 평론도 볼 수가 없거나 매우 제한적으로 보게 될 겁니다. 그런 세상을 원하는 이는 아무래도 별로 없겠죠.
좀 더 가까운 예로 설명해보겠습니다. 간혹 블로그나 커뮤니티에서는 자신의 글이나 코멘트가 무단으로 언론에 실리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지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런 분들이, 자신의 블로그나 커뮤니티에는 (언론 기사를 포함한) 남의 글이나 남의 저작물을 마구 가져다 쓰고 있거든요. 게다가 소위 ‘짤방’이라 불리우는 이미지의 경우에는, 출처나 저작자 명기조차도 하지 않은 채 싣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자기는 남의 물건을 훔쳐다가 쓰면서, 자기의 글이나 코멘트를 정상적으로 ‘인용’하고 있는 언론에 대해서는 반발을 하는 행동. 이것이 바로 ‘더블 스탠더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또, 대형 언론과 개인 블로그가 같냐느니 하는 식의 엉뚱한 반론이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말하기도 피곤합니다만, ‘자기는 (인용 요건조차도 충족시키지 않은 채) 남의 저작물을 마구 가져다 쓰면서 자기 저작물은 (인용 요건을 충족한 상태로라도) 절대 갖다 쓰지 말라는 태도를 더블 스탠더드라고 비판하는 것’에 대해, ‘대형 언론과 개인 블로그가 같냐?’라는 질문이 반론으로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한다는 말인지 궁금합니다.;;
굳이 논리학이니 뭐니 갖고올 필요도 없이, 그냥 봐도 두 명제 사이에 전혀 상관 관계가 없잖습니까. 그건 그냥 감정론일 뿐이지, ‘대형 언론은 개인보다 도둑질을 더 하면 안 된다’라는 명제가 어떻게 성립할 수 있단 말입니까. 대형 언론이든 개인이든, 도둑질을 하면 안 되는 것은 똑같잖아요.
반론을 하려면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할 것이 아니고, 보도와 비평을 위한 ‘인용의 자유’가 개인의 ‘프라이버시 권리’를 어디까지 침해할 수 있는가, 서로 상충할 수 있는 두 가지 권리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에 관한 논의가 되어야죠.
사람들이 인터넷에서라고 더더욱 상식없이 글을 쓰게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상식적으로 반론이 되지 못하는 주장을 반론이랍시고 쓰는 분들을 보면 그런 제 생각이 잘못되었나 싶을 정도입니다. 게다가 정작 반론이 될 수 있는 별도의 주장이 있는데도, 그쪽으로는 주장을 펼치지 않는 것을 보면 더더욱 그런 느낌이 들 수밖에 없죠.
어쨌거나 저는 ‘인용’ 문제에 대해서는 위와 같은 ‘상식’을 갖고는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로 중요치도 않은 소위 ‘네티즌’들의 의견을 구태여 인용해서 그런 네티즌들의 불만을 받고 싶지도 않기 때문에 남의 코멘트는 잘 인용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기존 언론들에게도 충고하고 싶은데요. 과거에는 오프라인의 실제로 존재하는 이들의 코멘트를 인용해서 기사에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온라인의 의견은 무시하는 편이었는데, 최근 들어서 사람들이 온라인에 많이 몰리고 온라인의 파워를 무시할 수 없게 되면서 자꾸 온라인의 코멘트를 인용하는 일이 발생하니까 이런 ‘상식의 충돌’ 문제가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그 부분을 기존의 언론들도 이해할 필요가 있고요.
두 번째로, 저는 저 자신 온라인을 통해 성장했고 온라인을 통해 데뷔의 기틀을 마련했고 지금도 온라인을 통해 본 블로그와 같은 활동을 지속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온라인의 힘도 잘 알지만 그 반면 온라인의 한계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존 언론들이 온라인의 힘을 인정해서 코멘트 인용이나 기사 소재를 온라인에서 찾는 것은 좋은데, 사실 온라인은 또 온라인 나름대로 한계가 존재하는 것도 분명하거든요.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닌 기사 소재 몇 개 찾으려다가 괜히 온라인에서 ‘네티즌’들에게 욕먹느니, 그냥 그런 기사 까짓 거 안 써버리면 그만입니다. 저를 포함한 소위 ‘네티즌’들은 자신들이 온라인에 발표하는 글이 매우 중요하고 엄청나게 주목을 받을 수 있는 힘이 있다고 과장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사실 타인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을 만큼 코멘트 ‘인용’에 대해서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편이거든요.
그러니, 정말 중요한 문제에 관해 꼭 필요한 코멘트라면 모를까 그냥 가벼운 기사거리 정도에 구태여 온라인 코멘트를 인용함으로써 일을 크게 벌일 소지를 만들지 말고, 그냥 기존 방식대로 오프라인 코멘트만 따거나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기사를 쓰는 편이 훨씬 더 낫습니다. 그리고 그 편이, 누군지도 모를 온라인의 코멘트 갖다 쓰는 것보다 기사 자체로서의 퀄리티나 신뢰성도 더 높아질 거고요.
뭐, 아직까지는 온라인이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한지 채 10년도 안 지난 상황이니까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충돌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이겠죠.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기존 언론들도 온라인의 특성과 한계를 잘 이해하고, 또 반대로 소위 ‘네티즌’들도 저작권이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아무튼 다시 이야기를 돌려서, 아즈마 히로키씨의 원고에는 “친구인 한국인 평론가 선정우씨”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저는 여전히 저 자신을 ‘평론가’로 자리매김한 적이 없습니다만, 역시 타인이 표현할 때에는 딱히 붙일 만한 직함이 없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직함이란 것은 자리에 어울리도록 붙여야 하는데, 해당 원고는 만화와 특별히 관련이 없는 내용인 관계로 ‘만화연구가 선정우씨’나 ‘만화 칼럼니스트 선정우씨’라고는 할 수 없었으리라 짐작합니다.
이 『문학환경론집 아즈마 히로키 컬렉션 L』에는 「논좌」 칼럼 말고도 한 군데 더 제 이름이 거론되는 부분이 있는데, 지금 이 책을 어디에 뒀는지 찾을 수가 없어서 적지 못하겠군요. (「논좌」 칼럼에 관해서는 과거에도 글을 썼던 적이 있어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만.) 이러니 책을 좀 정리해둬야 하는데….;; 나중에 책을 찾게 되면 다시 한 번 글을 써보겠습니다.
어쨌거나, 상하 분책을 했을 정도로 한 900페이지 가까운 이 『문학환경론집 아즈마 히로키 컬렉션 L』, 관심이 있을 분이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아마도 국내 번역되기는 힘들 테니 구매하실 분은 일본에서 사셔야 할 것 같습니다.
[미르기닷컴] 일본의 비평가 아즈마 히로키씨가 2007년 4월에 출간한 단행본 『문학환경론집 아즈마 히로키 컬렉션 L』에 제 코멘트가 수록되었습니다.
▲좌측 하단에 있는 것이 『문학환경론집 아즈마 히로키 컬렉션 L』.
이 단행본은 아즈마 히로키씨가 데뷔 이후 여러 잡지·매체를 통해 발표했던 칼럼이나 평론 및 각종 원고 중 아직 단행본화되지 못한 글들을 전부 모아 낸다는 목적으로, 「코단샤 박스(BOX)」 브랜드로 기획된 『아즈마 히로키 컬렉션 LSD 3부작』(Literature, Society, Dialogues) 중 첫 권인데요. 따라서 제 코멘트도 이 단행본용으로 따로 수록한 것은 아니고, 원문이 실렸던 잡지에서 이미 인용되었던 내용이 그대로 단행본에 실린 것 뿐입니다. 이번 『문학환경론집 아즈마 히로키 컬렉션 L』에 수록된 코멘트는, 본래 일본의 시사잡지 「논좌」(아사히신문사) 2005년 10월호에 수록되었던 아즈마 히로키씨의 연재 칼럼 「조류 05」의 연재 제 1회에 실렸던 것입니다.
다만 코멘트 인용은 말 그대로 ‘인용’인 관계로, 제게 사전에 허락을 받거나 하진 않고 아즈마 히로키씨가 마음대로 사용한 것입니다. 간혹 착각하는 분들이 계신데, ‘인용’이라 함은 저작권 개념상으로도 본래 ‘무단’으로 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따라서 ‘무단 인용’이라는 말은 앞뒤가 맞지 않는 조어(造語)인 것이죠. 인용 자체가 무단으로 해도 되는 것이니 말입니다.
물론 무작정 무단으로 해도 된다는 것이 아니고, ‘인용’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약간 딴 이야기로 빠지게 되겠는데, 요즘 들어 저작권에 관련된 논의가 많이 늘어난 것 같아 좀 더 자세히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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