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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대의 소설 『가축인 야푸』와 일본문화.

mirugi 2005. 5. 8. 13:59
백금기사님의 블로그에서 이시노모리 쇼타로 전집이 출간된다는 내용 중에 이야기가 나온 것입니다만…….

이시노모리 쇼타로의 만화 중에 『가축인 야푸』란 작품이 있습니다. 이것은 일본의 유명한 동명소설 원작으로 이시노모리 쇼타로가 만화화한 것인데, 전후 일본문학에 있어서 빛나는 걸작(?)─보통은 「괴작」이라고 일컬어지겠지만;;─ 하여간에 엄청난 작품입니다. 이런 작품이 무려 1956년에 연재 개시되었다는 것이, 그 이후 일본문화 전체에 있어서 자유로운 상상력을 발현시키는 데에 큰 역할을 한 것이겠죠. 또한 이런 작품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반대로 1968년 카와바타 야스나리, 1994년 오에 켄자부로의 노벨문학상과 같이, 일본문학이 그 자체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둠이 있어야 빛이 더 밝게 빛날 수 있다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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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본인도 마조히스트로 유명한 소설가 누마 쇼조가 1956년 연재개시한 sf sm소설(?) 『가축인 야푸』는 희대의 sm문학으로서, 작가 스스로가 매저키스트를 공언하고 있었습니다. 내용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백인여성이 지배하는 2천년 후의 미래세계에서 일본인의 후예가 「야푸」라는 이름의 가축으로 다뤄지며, 육체를 갖가지 방법으로 개조당하며 백인여성들에게 사육된다'는 것인데, 작중에 온갖 방법의 인체개조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후 일본만화, 특히 성인만화의 상상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데요. 특히 나가이 고가 『바이올런스 잭』에서 사용했고, 최근 『hunter×hunter』에도 묘사된 '인간돼지' (인간의 팔 다리를 잘라 돼지처럼 만든 가축, '인간 개'라고도 함)이란 개념 역시, 실은 1950년대에 이미 『가축인 야푸』에서 등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참고로 이시노모리 쇼타로에 의한 만화화는 1983년에 이루어졌는데, 이시노모리 쇼타로의 그림체가 원작의 '탐미적 매력의 백인여성'을 그려내는 데에는 무리가 있었다는 평가입니다. 최근에 에가와 타쯔야가 다시 『가축인 야푸』의 만화화에 도전하고 있지만, 괴작으로 너무나도 유명한 원작을 어디까지 표현해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조금 의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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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내용】:『가축인 야푸』와 현대 일본문화.

◆관련글:이시노모리 쇼타로 만화대전집 발매! (2005.05.07/백금기사의 기묘한 연구소)


(※이 이하에는 원작의 내용을 미리 알게 될 우려와, 잔혹 표현이라고 보일 수도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최대한 스포일러가 되지 않도록, 또 잔혹하지 않도록 주의해서 기술했으니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일단 주의해둡니다.)

줄거리는 일본인 청년이 약혼자인 독일 여성과 함께 타임머신에 끌려 2천년 후의 미래세계에 간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에는 백인여성이 군림하며, 흑인은 그 밑에, 그리고 일본인의 후예는 가장 급이 낮은 '가축'으로서 백인들에게 사육당하고 있는 세계였다는 것이죠. 그렇다고 해서 노예와 주인, 주종관계를 단순히 그린 것이 아닙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백인여성, 일본인의 후예 야푸는 그녀들을 '백여신'으로 숭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일본 황실이 숭앙하는 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가 실은 백인여성 '안나 테라스'고, 일본 황실의 시조는 그녀에게 사육되던 '펀치'라는 야푸였다고 묘사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이것이 일본 우익들의 비판을 받기도 하는 원인입니다만.

어쨌거나 『가축인 야푸』에서 야푸들의 존재는, 노예제도를 그린 작품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예를 들면 『혹성 탈출』) 지배자에 대한 저항을 보여주려는 목적으로 표현된 것이 아니란 점이 중요합니다. 그들의 존재는 '미[美]를 숭배하는 환희'로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 독특한 착상도 대담했지만, 그것을 일본이 2차대전에서 패전하여 항복한지 11년 후인 1956년에 발표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사실인 것이죠.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체 개조 중에서, '인간개' (혹은 '인간돼지')는 실제 고대로부터 인간사회에서 자주(?) 사용되어온 방식이기 때문에 그렇다 쳐도 『가축인 야푸』에 표현되어 있는 인간에 대한 갖가지 잔혹 묘사는 집요할 정도입니다. 육변기, 인간의자, 혀 인형, 입술 인형, 축인마, 축인견 등등……. 필설로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한 묘사가 등장합니다.

이렇게까지 묘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소설이 연재된 잡지가 「기담 클럽」이라는 변태성욕 전문지(?)였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잡지에서조차도 '자주 규제'의 대상이 되어 결국 1959년 제 27장까지 연재된 후 『가축인 야푸』의 연재는 중단됩니다. 그리고 첫 단행본화가 된 것은 연재 중단으로부터도 10년 이상 지난 1970년이니, 이 작품이 당시에도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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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을 평가했던 일본의 예술가는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할복자살로 유명한 미시마 유키오, 불문학자 시부사와 타쯔히코 (일본에 바타이유, 사드 등의 프랑스문학을 소개한 장본인), 극작가 테라야마 슈지 (『소녀혁명 우테나』에서도 그 영향이 엿보이는) (실제로 『우테나』의 음악을 맡은 j.a.시저는 1960년대 테라야마 슈지 극의 음악을 맡았던 사람이죠) 등이 있습니다. 미시마 유키오와 테라야마 슈지는 또한, 「장미족」으로 대표되는 일본 동성애문화에도 깊은 이해를 보였던 예술가들이기도 하죠.


『가축인 야푸』는 비단 sm소설만으로서 이 정도의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 sf적 미래묘사 역시 기발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작중의 미래사회에 대한 표현이 상세히 표현되어 있어서 sf로서도 충분히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라는 것이죠. 그런 sf에 기상천외할 정도의 마조히즘 표현이 이 장편소설을 재미있게 만드는 요소입니다만, 그러면서도 그로테스크하며 읽는 이를 불쾌하게 만드는 치밀한 잔혹 묘사는 역시 이 작품을 만인에게 받아들여지긴 힘들게 합니다. 그나마 시각적 요소가 없는 소설이니 읽을 수 있는 것이지, 만약 이 작품이 영화화된다거나 하면 많은 찬반양론에 휩싸이게 될 것은 분명하죠. 그것을 만화로서 비주얼화시킨 것이 이시노모리 쇼타로였고, 최근에는 에가와 타쯔야인 것입니다.


아무튼 전후 일본문학과 일본문화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서적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이 작품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작가 자신의 개인적 성적 취향인 마조히즘과 문학적 재능이었겠지만, 이 작품을 컬트적이나마 화제를 모으고 전후의 중요한 문화사적 업적으로서 남긴 것은 일본인들 자신이거든요. 어째서 일본에서 종전 직후 「백인에게 지배 당하는 일본인」이란 내용의 이런 작품이 나왔고, 또 평가를 받았는지. 또 잠시만의 평가가 아니라 발표로부터 50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만화화되는 등 살아있는 작품으로서 지속적인 비평의 대상이 되고 있는지. 50년 전의 작품으로 지금까지 살아 숨쉬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를 생각해보면, 『가축인 야푸』가 일본사회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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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간만에 원고료 없는 글을 신경써서 써버렸는데요. (뭐, 짧은 분량이니까 가능한 것이지만.) 만화나 애니메이션 관련 글이라면야 그나마 쓸 수 있는 장소가 있는데, 만화·애니메이션도 아니고 차라리 아예 순수문학 계열도 아닌 이런 식의 글은, 딱히 실을 수 있는 장소가 없다시피 하다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그 덕분에 이건 그냥 블로그에 써버린 것인데요. (다른 블로그에서 트랙백하느라고 그런 것이기도 하지만.)

일본을 이해하고 일본문화를 보려는 시도가 늘어나고는 있으나, 단순히 일본만화 뭐가 요새 히트하고 있다느니 일본영화 뭐가 있다느니 아니면 j-pop에서 무슨 그룹이 인기 있고…… 그런 정도 뿐이지, 일본문화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일본의 현대문화사[史] 및 현대에 발표된 중요한 작품들, 특히 서브컬처 장르에 속하는 작품들에 대한 소개는 너무 빈약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현대 일본인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떻게 행동할지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죠. 일본을 비판하더라도, 긍정하더라도, 어느 쪽이건 우선 일본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모든 국민이 다 일본을 이해할 필요는 없겠지만, 적어도 학계나 업계 등 해당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뭐, 비단 이것은 일본문화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전세계 모든 문화나 학문에 전부 공통되는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결론은 결국, 한국사회에서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더 커져야 한다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하지만, 조금 장문[長文]의 글이 되어버리면 3줄 요약 없이는 내용 파악도 하지 않으려 하는 세태 속에선 쉽지 않은 일인 것 같군요.;; 뭐, 저로서도 인터넷으로 긴 글을 읽는 것은 불편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것들이 서적에 실릴 정도로 잘 팔리는 이야기가 아니니 말이죠……. 그러니 자꾸 요새 「인문도서 2000고지가 무너졌다」 (인문분야의 경우 초판 2천부도 안 팔린다는 이야기)라는 말만 출판계에 떠돌고 있는 것이죠…. 인터넷에서도 그림 하나도 없이 긴 글을 읽을 수 있게 되는 능력을, 앞으로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가축인 야푸』 원작 (아마존 저팬)
 『가축인 야푸』 1권 (문고판 전 5권)
@『가축인 야푸』 에가와 타쯔야 만화판 (아마존 저팬)
 『가축인 야푸』 4권
 『가축인 야푸』 5권 (∼5권까지 발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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